12.12 군사반란, 목숨걸고 진압시도한 장태완
장태완 |
1931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신동(현 구미시 신동 세월마을)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24회)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그는 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 취급이었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장교였다.
고위급 장교 시절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1진으로 파월되었으며, 대령 시절엔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 보직에서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과 제5군단 참모장을 역임하던 중,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 이후의 근위부대 내 물갈이 덕에 비육사 출신임에도 핵심 보직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되어 2년 3개월간 근무하였다. 이 때 갑종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에 보냈다.
1973년 6월 어느 날,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지 2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벌컨포 설치 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 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ㆍ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이 들자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 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 직위가 별을 단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하극상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 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김상구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장 장군.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 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사령관님,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양자택일 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11기 이후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4년제 정규 과정을 모두 밟고 학사 학위를 취득한 자신들이 진짜배기 육사 1기라는, 자존심만 센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나회가 이런 흐름이 강했다. 정작 육사 1~10기는 6.25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반면 11기는 전쟁 와중에도 후방인 부산에서 편히 교육받다 종전 후 임관했는데 말이다. 이들은 육군종합학교, 학군단, 육군사관학교 1~10기를 깔봤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회 기준에서 껄끄럽던 육군종합학교 출신 장군들은 1985년을 끝으로 모두 예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사건 이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그후 육본 교육참모차장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11월 16일부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수도경비사령관 직위로의 보직 이동을 명받았다.
12.12 군사반란과 진압시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비록 국방부 명으로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쿠데타에 불법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히 날뛰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전황은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하고 반란군인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전황을 어떻게든 뒤집으려 한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
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수뇌부의 베이스가 되었기에 그나마 운용이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 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반란군 수뇌부들을 공격해야 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던 9공수에게 "반란군 본거지인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신군부는 당황했는데 1공수, 3공수 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교통요건이 더 좋아 서울에 더 가까이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둘 시 본거지에 들이닥쳐 자신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는 너무 순진했는지 최대 실책을 저지른다. '반란군부가 1,3공수 회군시킬테니 진압군도 9공수를 회군시키자'라는 일명 '신사 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응사했지만 반란군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 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경사만 남게 된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 최후로는 하나회 출신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여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간 후 자신의 부하이자 배신자인 신윤희에 의해 곧 체포된다.
일각에선 이걸 가지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으며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 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의 주축이었다.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이었다. 인근에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 준비 명령은 받았으나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로 출동하여 부천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은 전두환 측의 신사 협정 제안에 속은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 당했다. 그 외 1, 3, 5공수여단은 쿠데타군의 주축이었고 제9보병사단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 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非 하나회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키는 등 한마디로 사면초가였다. 서울을 방위하는 수경사 인근에 수도권 중 서북부(고양~파주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상비 사단만 3~4개(1, 9, 25, 30사단)를 가지고 있는 1군단의 군단장이 12.12 군사반란 때 경복궁에 있던 황영시였고 서남부(인천 및 일대 도서 지역 포함)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장이 함께 있던 차규헌이였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 되자 사령부 행정병과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과 행정병을 합쳐도 100여 명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 전력의 전부였다. 즉, 현실적인 진압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 33경비단을 비전투 병력 100여 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건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야포단을 동원하면 반란군 수뇌부가 몰려있던 30 경비단을 타격하는 일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그 30단이 있는 곳이 민간인들도 많은 경복궁 일대였다. 이때나 그 후에나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은 서울 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쯤되면 설사 9공수 병력이 중도에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어도 반란군 진압이 가능했을까 싶은 상황이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군인의 의무를 저버린 하나회 장교들과 한남동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인근의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로 달아나 숨어 버리고 겨우 육군본부 B-2 벙커로 끌고 왔더니 충정부대 출동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싸워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며 윽박지르던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다.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 26사단, 9공수여단,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체포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은 뒤 5년 후배인 전두환 때문에 강제로 쫓겨났으며 6달이나 집에서 갇혀 지낼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12.12 군사반란 직후에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이 된지 고작 1개월 내외만에 터진 일이었다. 후임자는 최전방 병력을 빼돌려 반란에 참가시킨 9사단장 노태우였는데 노태우는 이후 수경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
장태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에게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며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故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전두환 정부 시절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 산천을 유랑했고 산꼭대기에선 분노를 고함으로 풀고 평화와 민주 발전을 염원했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장태완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참고로 장태완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싶어했지만 당시엔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지던 시대라 장태완은 굳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와서 보면 좀 후회도 된다고.
다만 하나회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전두환이 장태완을 회유하려 했는지 어쨌는지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장태완이 훗날 조국을 지킨 의리의 참군인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불편함을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우린 역사의 증인이니 서로 몸 조심하잔 말을 듣던 장태완 입장을 고려하면 부친도 돌아가신 마당에 외아들마저 의문사를 당했는데 전두환이 기세등등할 무렵 어그로 끌려봐야 좋을건 없기에 일단은 과하지욕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본인이 수기 등에 관련 사정을 남긴게 있다면 좀 더 정확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구체적인 속사정은 알 길이 없다. 확실한건 죽을 때까지 장태완이 전두환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후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가,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 학대와 사기 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설 기업 르메이에르로 영전돼 한동안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르메이에르 관련 비리와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민주화 이후
1993년에 <12.12 쿠데타와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세월이 흘러 절판되었기에 국회도서관 국회전자도서관에서 원문 보기가 가능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도 2016년에 전자책 형태로 스캔본이 올려져 있긴 하나 국중도와 협약된 공공/대학도서관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열람해야 한다.
그 책은 2012년 명성출판사가 전자책으로 재출판해서 교보문고에서 구입이 가능하나, 어째서인지 분야가 장르소설→전쟁/대체역사로 되어있다.
이후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서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정계 활동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장태완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에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햇볕정책이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편이었고, 2002년 6월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분당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에 찬성하기도 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다.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이 유행하자 드라마 내용이 전두환을 미화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은 적도 있었으나, 박정희가 하나회를 비호한 것이 12.12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며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망
2008년 폐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폐를 3분의 1이나 잘라냈지만 수술은 잘 되었고, 이후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12.12 당시 장태완을 배신한 전두환 최측근 장세동이 방문했다.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장세동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서, 장태완 장군의 직속 부하였다. 장태완 장군이 비록 수경사령관에 취임한지 1달 여밖에 안되었다고는 하나,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에는 대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 한국군이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직속 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체포를 그토록 망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 두고 신군부 인사, 장태완 前의원에 '화해의 손길'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신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안 간 걸 생각하면 그나마 염치가 있었던지 아니면 철면피인건지 둘 중 하나일듯.
사후 1년만인 2011년 또 신군부 관련 구설수가 생겼는데,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묻힌 것도 웃긴데 하필이면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묘가 장태완 장군의 묘와 가까이 있었던 것.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도 안현태와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구속되면서 군 형법상 반란 수괴 혐의 등으로 먼저 구속된 전두환을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 앞에서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근데 이 나라에선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묘 옆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유학성 前 중앙정보부장의 묘가 있다. 물론 유학성이 1997년에 사망했고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작고했으니 국립현충원 측에서 정승화 장군의 묘 자리를 잘못 쓴 쪽에 가깝다. 그나마 장태완 장군처럼 신군부에게 맞섰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아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으니 장태완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여담
12.12 이후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진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12.12사태 후 TV 등을 통해 보안사로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곡기를 끊었고,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1982년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장태완의 아들은 장태완이 강제 예편 당한 직후인 그 해 4월 인동 장씨 재실 근처인 경북 칠곡군 낙동강변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장태완의 부인은 2010년 장태완 사망 이후 우울증을 앓다가 2012년 1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현재 장태완의 후손은 그의 외동딸 장현리, 사위 박용찬, 외손녀가 남아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의 휘하 부대장이자 그를 배신하고 하나회의 명으로 전세가 기운 수경사를 접수하여 군사반란을 종결시켰던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전 육군헌병감은 장태완 사망 2년 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불쏘시개에 가까운 책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장태완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사병(私兵) 역할을 충실히 한 바람에 박대통령 시해범(?)을 잡으려고 했던게 장태완의 무모한 명령으로 커진 사건이라며, 장태완 소장이 당시 술에 취한 상태라 무모한 사살 명령만 내려서 장교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시종일관 자신이 가담한 반란군 세력의 입장을 옹호하며 상관 장태완 탓을 했다. 5.18 관련 왜곡, 망언을 일삼아온 유사역사학자 김대령도 이 책을 근거로 '장태완 장군은 김재규의 부하이며 12.12 군사반란은 오히려 장태완 장군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식의 황당한 발언을 했다. 물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걍 개소리다. 더욱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사실은 책이 나온 다음 날(2012년 1월 17일) 장태완의 부인 이병호 여사가 유서를 남기고 투신해 서울 대치동 아파트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인데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라갔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누가 보기에도 非육사 출신 육군참모총장에 적합한 인물었다는 평이 많았지만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정권을 잡아버린 바람에 장태완의 승진 기회는 영원히 올 수 없었다.
장교 생활을 하는 동안 전두환과 노태우로 인해 심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진급 속도인데 일단 임관 년도부터 장태완이 5년 빠르며 전두환과 노태우가 소위로 임관했을 때 장태완은 이미 1차 중대장을 완료한 중참급 대위였다. 게다가 장태완은 전두환 및 노태우보다 군공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도 1978년에는 이 세 사람 모두 동일한 소장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장태완은 진급 속도에 대해 꽤 많은 불이익을 당해왔던 것이다. 참고로 장교들의 세계에서 5년 차이라면 2계급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기수차이다.
평소 장태완은 부하들의 체력 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힘들고 빡센 훈련을 많이 시켰으나 훈련 성적이 좋고 체력이 우수한 병사에게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둑한 포상들을 주었다. 반대로 체력이 부족한 병사들을 엄하게 질책하여 어떻게든 체력을 끌어올렸다. 칼바람 부는 한 겨울철에도 부대원 전부 웃통을 벗고 연병장에서 구보를 했지만 장병들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도 병사들과 함께 직접 웃통을 벗고 뛰었기 때문이다. 인간 장태완은 반대로 자상했는데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장태완이 육군 소장인데도 일개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 끈을 몸소 묶어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왔다.
장태완의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의 회고록이 있다. 장태완이 26사단의 사단장으로 취임한 후의 변화에 대해 당시 26사단에서 복무한 사병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 회고록의 내용이 조금 길기 때문에 내용 몇 가지만 요약해서 기재한다. 1970년대 많은 짬밥은 그저 똥국에 오래 묵은 정부미로 지은 푸석푸석한 밥, 고춧가루도 제대로 넣지 않은 허여멀건한 김치, 고기는 흔적도 안보이는 고깃국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장태완이 부임한 후 26사단 사병 식당에 나오는 식단이 엄청나게 개선되었고, 건더기 푸짐한 소고기국에 제대로 튀긴 생선 튀김, 계란찜, 깻잎무침 등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이나 먹을 반찬이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병사들은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만큼 장태완이 휘하 병력에게 돌아가는 식단을 눈여겨봤다는 얘기다. 심지어 종종 불시에 본인이 직접 병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급양관이 요령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태완은 조금이라도 사병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이려고 매우 노력했다. 회고록에는 체력 검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병사를 그 자리에서 바로 포상 휴가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26사단에서 매주 수요일은 체력 단련의 날로 부대간 체육 경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경기의 치열함이 장태완의 부임 후 달라졌다고 한다. 좋은 성적을 낸 부대는 그 날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먹고 여유로운 저녁 점호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쁜 성적을 낸 부대는 초주검이 될 정도로 고된 기합을 받았다고 한다. 장태완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했지만 본인도 그 훈련을 같이 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힘들어하면서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부하들에게 엄격한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한 인물로 유명했다. 70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현역 군인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유지할 정도의 노익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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